1988년, 개발기간 4년, 시제기 2대 생산을 목표로
KTX-1 탐색개발이 시작되면서 연구팀은
항공기 사업본부 안에
사업책임자 강위훈 본부장, 체계실장 안동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34명의 연구원을 갖추고
본격적인 개발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 한편 한국이 훈련기를 개발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세계 유수의 항공기 제작업체에서
한국의 훈련기 시장을 겨냥하여
공동개발 의사를 타진해 오기 시작했다.
T-34C 터보 멘터 (Turbo Mentor)를 개발한
미국의 비치크래프트(Beechcraft)사,
EMB-312 투카노(Tucano)를 개발, 생산중인
브라질 엠브레어(Embraer)사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업체는
스위스 필라투스(Pilatus)사였다.
이미 PC-7, PC-9 시리즈로
당시 터보 프롭 훈련기 세계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필라투스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많아서
활발한 마케팅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본사 부사장이 직접 국과연에 와서
강위훈 본부장을 만나는 등
성의있는 자세를 보인 끝에 '88년 필라투스는
국과연과 기술자문계약을 맺게 된다.
필라투스로서는 이를 발판으로
한국의 훈련기 시장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KTX-1 개발계획을
자기네 회사의 설계를 이용하는
공동개발 계획으로 끌어가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후 계약에 의해 3년간, 연간 10일씩,
개발팀은 한국인이 스위스의
필라투스 공장을 방문하거나
필라투스의 기술자가 한국을 방문하는 방식으로
기술자문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것은 우리 설계자들에게 작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 ...

드디어 '88년 겨울, 기술자문계약에 의한
첫번째 한국 방문단은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필라투스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알프스의 산자락답게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곳이어서
방문단으로 간 국과연과 참여업체의 연구원들,
그리고 공군 관계자들은
두꺼운 외투깃을 잔뜩 치켜 세우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간 이들이 처음 보게 된 것은
브리핑 룸에서 상영되는 홍보 비디오였다.
이 비디오는 알프스의 능선을 멋지게 활강하는
스키어들을 보여주는 듯 하더니
이들의 모습이 점차 비행기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고속 기동과 각종 곡예비행을 하는 모습을
박진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었다. ...

이어진 필라투스사의 생산라인 투어.
방문단은 거대한 치구(治具, jig)위에서
최종조립을 기다리고 있는
매끄러운 기체와 날개의 모습을 보며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모두 소리없는 감탄을 연발했다. ...
사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각자 맡은 분야에서 질문과 확인사항들을
책 한권 분량으로 빼곡히 적어온 그들이었다.
항공기 개발기술은 오랜 세월 동안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축적되어 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하는데,
선진 항공기술을 현장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남다른 사명감으로
하나라도 더 배워가겠다며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던 방문단이었다.
"아니, 여러분. 이러시면......”
일행을 안내하던 필라투스의 직원이 말릴 겨를도 없이
연구원들은 각자 가져온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들고
각자 맡은 분야의 기체 특징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외형을
스케치하는 연구원도 있었다. ...

방문단은 매일 필라투스 공장에서 본 것들중에
특기할 사항들을 '일일 보고서'라 해서
정리하도록 했는데
정리된 안건은 한 사람당 십여가지가 넘었다. ...
그러나 이날부터 필라투스의 안내직원은
방문단 일행의 연구활동을 방해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필기도구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습니다."
"아니 왜요?"
지난 며칠간 한국 방문단을 주의깊게 살펴본
필라투스에서
이들의 열성이 위험수준인 것을 깨닫고
자료유출을 막기로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일정은 며칠이 더 남아 있었고,
적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가져갈 한국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궁리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봐, 이건 뭐지?"
"글쎄...... 왜 구멍을 뚫었을까?....."
"이거 딱 담배 한개피만한 구멍인데?"
적지도 못하고 자로 재지도 못하게 된 일행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총동원해 자료를 수집했다.

특히 담배는 공장방문의 필수품이 되었는데,
크기가 일정한 담배 개피로
볼트의 크기를 재 보기도 하고,
기체에 뚫려 있는 구멍에 집어넣어 둘레를 재기도 했다.
이렇게 대략적인 사이즈만 알아도
그 부위에 걸리는 설계하중(荷重, load)이나
중량을 역산(逆算)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한켠에서는 몰래 화장실에서
양복 안 포켓에 넣어두었던 조그만 수첩을 꺼내
몇 시간 동안 본 것들을 깨알같이 적기도 했다. ...
그러나 스위스 엔지니어들은
한국측 설계안의 잘못은
정확하게 지적했지만 그게 전부일 뿐,
해답은 절대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해결책은 국내 연구진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고 있었다. ...

... 그러나 필라투스와의 우호적이었던 관계는
얼마 못가고 깨어지고 만다.
필라투스가 공동개발을 하자면서 자신들이 개발한
날개형상(wing configuration)을 사용하라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국과연을 비롯한 한국으로서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특히 날개는 비행기의 90%라고 할만큼 중요하며
조종성과 안정성을 결정짓고
기체의 크기까지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날개 설계를 필라투스 것으로 쓴다는 것은
결국 항공기 설계 전체를 필라투스의 안(案)대로 따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KTX-1 사업팀이 자존심을 걸고
필라투스사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결국 KTX-1과 필라투스의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기술자문계약이 끝난 3년후
공군에서 제기된 훈련기 도입사업 (TX-Low)에서
필라투스는 KTX-1 개발사업을 위협하는 존재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
- 노여래 지음, 월간항공 기획출판팀 기획, 2006,
『KT-1 프로젝트 최초의 국산 훈련기 개발과
수출에 얽힌 비화』, 와스코, 63-68쪽.
월간항공 출판기획팀
월간항공(기획출판팀)은 1989년 창간된
우리나라 유일의 항공우주전문매체로
항공우주문화의 저변확대를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 실제 항공기를 제작한
한국항공우주산업(주)를 비롯한 제작업체의 엔지니어들,
이들이 만든 항공기를 타고 목숨을 건
시험비행을 감행했던
대한민국 공군의 시험비행 조종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체 계획을 조정하고
이끌어나간
국방부와 정부 관련기관 등 각계 관련자
200여명을 직접 인터뷰했으며,
그 결과 가장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우리 항공 무기 개발의 현장 스토리를 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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