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도 예비군 제도가 있었다.
조선의 병역법은 60세가 되면 병역의무가 끝났다.
'시정의 법(侍丁法)'도 있었다.
이는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면 아들 1명,
90세 이상이면 아들 2명을 면제시켜 주는 제도였다.
그런데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놀면서
나라에 보탬이 안 된다."라는 불만이 쇄도했다.
그러자 1468년 12월 27일 예종이 나섰다.
"나라에 보탬이 안 되는 이들을 가만 둘 수 없지 않은가.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 때를 대비하라.
60세가 넘어 제대한 자들은 '노장위에 소속시키고,
'시정의 법'에 의해 면제된 자들은 '충효위'에 소속시켜라.
이들을 현역병으로 참여시키지 않더라도
1년에 한 번씩 점고點, 즉 인원점검이라도 해서 관리하라."
그러고 보니 신기한 일이다. 지금의 예비군 제도가 생긴 것이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난 1968년이 아닌가.
예종이 제대자들을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인원을 점검한
일종의 예비군 제도가 생긴 것이 1468년이었으니
꼭 500년 만의 부활이었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 이야기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비집고 살아야 했던
남성들의 평생 이야깃거리임에 틀림없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무려 4,000건이 넘는
군대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를 보아도
7,544건이나 되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새삼 조선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이야기의 주제는
아마도 '병역면제'라는 생각이 든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보전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병역의 의무를 견뎌야 하는 이 땅의 남자들이니 말이다.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싫어도 가야만 하는 운명인데 어쩌랴.
다만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인 1659년 효종 10년 2월 11일
병지참지 유계[兪棨]가 올린 상소는 두고두고 금과옥조가 될 것이다.
"지금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팔구 명을 차지하고 (중략)
선량한 백성만 유독 병역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유계는 이어 송곳 같은 한마디를 더한다.
“바로 지금 병역의 불평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방법으로 민중의 마음을 화합시켜
나라를 망국에 이르지 않게 하겠습니까."
그렇다. 유계는 핵심을 찌르고 있다.
바로 '병역의 괴로움'보다 더 큰 문제는
'병역의 불평등'이라는 것이다.
그 불평등이 백성의 화합을 무너뜨리고 급기야는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 이기환 지음, 2018, 『 흔적의 역사 - 이기환 기자의 이야기 조선사 』, 책문, 259~89쪽.
이기환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나 성균관대를 거쳐 1986년에 《경향신문》 기자로 입사했다.
각양각색의 부서를 거친 뒤 기자생활 15년을 넘기면서부터 문화부에서 문화유산을 담당했다.
비무장지대 일원을 1년간 답사하는 기회를 얻었고,
중국과 러시아의 평원을 장기간 탐사하는 귀한 경험을 쌓았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비무장지대 문화유산’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지금 사회에디터의 직책을 맡고 있는 와중에도 역사칼럼을 열심히 쓰고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라는 팟캐스트와 블로그를 운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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