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에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일어난 사건은
흔히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발생한
유일한 제노사이드인 것처럼 이야기된다.
그러나 규모는 작지만 이와 비슷한 참사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곳곳에서 벌어졌다.
태즈메이니아의 제노사이드는
우발적인 경우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영국인들이 지금의 오스트레일리아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발생했던 일반적 현상의 하나였다. ...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유럽인들의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일어난
수 많은 영토 침탈형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로 이해되어야 한다.
태즈메이니아의 비극은 백인들의 인종주의와 개척 의지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만날 때 어떤 결과가 생겨날 수 있는지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을 절멸에 이르게 한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백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뿌리 깊은 인종주의였다.
백인들은 원주민 어린이들을 사로잡은 뒤에 머리를 부숴버리거나,
사격 연습용 표적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주민을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원주민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 있는 중간적 존재에 불과했다.
백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 대한 시각은
그들의 정책에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식민지 개척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온 영국인들은
이른바 '무주공산(無主空山) terra nulliu 독트린을 선언했다.
그들의 눈에 식민지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어느 지역에 가든지 그곳에서
유럽풍의 농업 경영 형태나 서구식 문명이 발견되지 않으면
비어 있는 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곧바로 정복과 정주 활동에 들어갔다.
무주공산 정책 아래서는
원주민들의 토지 소유권이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백인들의 오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변명하기 위해 일종의 신화까지 만들어냈다.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시인'과 '원시 문화'는
백인 개척민과 조우하는 순간
이미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고 주장하며,
원주민의 열등성과 무가치성을 강조했다.
또한, 자신들이 행한 학살은
원주민들의 운명인 소멸을 가속화했을 뿐이며,
그 누구도 이와 같은 '하느님 나라의 보편법' 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변했다.
그 당시 백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던
'비어 있는 땅'에 관한 거짓말과 '불가피'의 신화가 아니었다면
대규모 학살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백인 개척민들의 신화와 거짓말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19세기 전반에 벌어졌던 사건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였다.
바로 이때부터 정도를 넘어섰던 식민지 정책과 학살의 책임 문제가
학술적인 연구들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원주민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토지의 소유권 문제도 법정에서 다루어졌다.
1996년에는 원주민 아동들을 부모의 품에서 강제로 떼어내어
백인식 교육을 받게 했던 과거 식민지 정책에 관한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제노사이드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적·사회적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 '잃어버린 세대들stolen generations' 에 관한 논쟁은
원주민 후예들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 및 배상,
그리고 화해에 관한 논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식민지 정책의
폭력성과 학살에 대해서는 시인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러한 결과들이 뚜렷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이 과거사가 제노사이드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토지 보상과 관련된
현실적 사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95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Aboriginal Lands Bill에 따라
12개 구역의 토지를 원주민 공동체에 반환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토지 관련 소송에 대해서는 소송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있다.
오늘날 태즈메이니아와 인근의 여러 섬에는
최대 1만 6,000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물론 이들은 순수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이 아니라,
식민지 시절에 백인 개척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의 후손이다.
이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가들 가운데
급진적인 사람들은 보상 및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
자치정부 수립 운동까지 전개하고 있다.
- 최호근 지음, 2022,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책세상, 139-142쪽.
최호근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일 근현대사와 역사이론을 전공했고,
독일 빌레펠트대학교에서
막스 베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비교 연구를 수행했다.
국내외의 역사적 장소들을 탐사하면서
기억문화와 기념문화에 관한
비교 연구를 폭넓게 진행했다.
현재는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의
문화적 영향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
초국가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한국 민족주의의 문화적 형성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사총》, 《독일연구》, 《서양사론》 등
여러 학술지의 편집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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