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는 제가 일곱 살이 되던 무렵까지
네 식구가 살았던 바깥채 건물을 밀어냈습니다.
낡다 못해 삭아가던 건물을 밀어내고
마당을 더 넓게 내는 쪽을 택했지요.
좋은 기억도 좋지 않은 기억도 ,
어쨌든 저의 첫 기억들이 모두 그 방에 있었습니다.
뒷산에서 뛰어놀다 옻나무를 만져서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은 나를 엄마가 달래주던 것,
그때 친정에 온 막내 고모가 울고 있는 나를
문지방에 선 채로 안아주었던 기억.
도시에서 온 고모의 옷자락에서 나던 장미향 같은 화장품 냄새.
무슨 일인가로 취해서 들어온 아빠가
세숫대야를 마당으로 집어던진 기억
(아빠가 잘못했네요).
어른들이 밭일 나간 오후면 강아지 '방울이'를
방으로 데려와서 해가 저물도록 같이 놀았던 기억.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왜 자꾸 개를 방에 들이냐고 혼냈던 기억.
그 모든 추억이 담겨있는 방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내가 안채의 방을 쓰게 되고,
무럭무럭 자라 그 집을 떠나고....
그 후로 한동안 참기름이나 고구마 같은 것을 보관해 두는
창고로 쓰이던 그 방이 없어지고 나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사진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요.
그렇게나 많은 추억을 쌓으면서도,
어째서 사진 한 장 찍어둘 생각을 못했을까요?
그건 너무 당연히 여기던 '집'이었기 때문일까요?
더 늦기 전에 저를 키워낸 이 집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어졌습니다.
방을 현대식으로 덧대는 동안 집의 구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동네에서 돌던 유행에 따라 지붕의 색깔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어떤 나무가 있다가 사라졌고 없다가 새로 생겼는지.
그래서 요즘은 시골집에 갈 때마다 집의 풍경을 찍어두고 있어요.
야트막한 길에 올라섰을 때부터 보이는 집의 전경,
뒷산에서 내려다본 집의 뒤통수,
담벼락에 여전히 기대어선 아궁이 같은 것들을요.
김신지 지음, 2021,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 잊지 않으려고 시작한 매일의 습관』,
휴머니스트, 98-99쪽.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일상에 밑줄을 긋는 마음으로
자주 사진을 찍고 무언가를 적는다. 10년 동안 잡지 에디터로
《PAPER》, 《AROUND》, 《대학내일》 등에 글을 썼고 현재는
트렌드 당일 배송 미디어 캐릿(Careet)을 운영하고 있다.
일상을 사랑하기 위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기록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마시는 모닝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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