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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서랍
詩: 이 병률
터미널에서 스친 한 노인이
한 손에는 약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전화기를 들고
마음이 아파서인지 몸을 반쯤 접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순수하게 했는데,
나한테 이러믄 안되지
나는 마음의 2층에다 그 소리를 들인다
어제도 그제도 그런 소리들을 모아 놓느라
나의 2층은 무겁다
내 옆을 흘러가는 사람의 귀한 말들을 모으되
마음의 1층에 흘러들지 않게 하는 일
그 마음의 1층과 2층을 합쳐
나 어떻게든 사람이 되려는 것
사람의 집을 지으려는 것
나의 마련은 그렇다
한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은
한 사람이 깊숙히 칼에 찔리는 것은
지구가 상처받는 것
지구의 뼈가 발리고 마는 것
지구 뿌리에 빗물 전해지듯
당신들이 이 지구에 귀함을 보탤 거라면
나의 완성은 그렇다
지구 사람 가운데 나에게 연(緣)이 하나 있다면
당신들의 흩어짐을 막는 것
지금은 다만 내 마음의 1층과 2층을 더디게 터서
언제즘 나는 귀한 사람이 되려는 지 지켜보자는 것
나의 궁리는 그렇다
이병률 지음, 2017,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54-55쪽.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 「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등이 있고 산문집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혼자가 혼자에게> 등을 펴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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