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하면 때론 또 다른 종류의 충격에 말문을 읽기도 한다.
날 이렇게 뒤흔들어 놓은 책이 어째서 이제껏 세상의 흐름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했던가?
도스토옙스키가 『악령』을 쓴 지가 언젠데 이렇게 우리들의 세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예전 모습 그래로란 말인가?
인간이 이미 한참 전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와 같은 인물을 상상했음에도 폴 포트 같은 작자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체호프가 『사할린 섬』을 썼음에도, 끔직한 집단 수용소는 또 어떻게 생긴걸까?
...
책은 우리의 의식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악화일로로 치닫는 세상을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한다.
물론 문화의 힘을 침이 마르도록 강변하는 몇몇 언변가는 예외로 쳐야겠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늘 화젯거리가 궁하기 마련인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간의
별 볼일 없는 모임에서는 늘 독서가 대화를 이어주는 주제의 지위로 격상되곤 한다.
아니 독서가 의사소통의 전략으로 전락했다고 해야 할지도!
책 속의 그 숱한 소리없는 아우성과 고지식한 무상성이란 결국,
어느 덜떨어진 위인에게 내숭형 숙녀를 낚을 빌미가 되어줄 뿐이다.
...
설사 독서가 즉각적인 의사소통의 행위는 아니라고 해도,
결국 독서는 공유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가며 신중하게 선택된 공유다.
만약 우리가 책을 선택할 때 학교며 평론이며 온갖 형태의 광고를 통해서
접하게 된 목록을 참조했을 경우와,
아니면 - 교육적 취지에서 선정된 권장 도서가 아닌 -
친구나 연인 또는 가족 덕분에 책을 읽게 되는 경우,
결과는 자명하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또한 책에 대한 느낌도 우선은 가장 소중한 이에게 먼저 전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감정이란 원래 책읽기의 욕망처럼
무엇 무엇을 더 좋아한다는 속성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한다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요새에 자리잡게 된다.
책과 친구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이다.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쥐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작 책에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은 잊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한 권의 문학 작품이 발하는 막강한 위력일 터이다.
일상마저도 까맣게 잊게 만드는.....
다니엘 페나크 지음, 이정임 옮김, 2018, 『소설처럼』, 문학과 지성사, 108-111쪽.
194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아시아.유럽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프랑스 니스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26여 년간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말로센 시리즈’와
어린이 책 ‘까모 시리즈’에서 보여준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넘치는 표현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미스터리 비평상(1988년), 리브르앵테르 상(1990년),
르노도 상(2007년)을 수상했다.
'책 읽기, 글 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청이 아버지는 왜 잔치가 끝날 때 왔을까? (2) | 2022.10.05 |
---|---|
언젠가 그리워질 공간을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8) | 2022.09.29 |
블로그 방문자 수 늘리는 방법 (11) | 2022.09.04 |
만년필을 쓴다고? 굳이? (4) | 2022.08.27 |
바쁜 당신... 언제 책을 읽을 것인가? (4) | 2022.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