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기 상황은 시간과 관련이 깊다.
우리는 시간을 조직하고 일그러뜨리고 인내한다.
반면 우리의 시간을 오만하게 쥐고 흔드는 미세한 힘에
휘둘리기도 한다.
교통체증에 갇혀있듯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정작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이 보이지 않는 정체 구간에서 우리는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여태껏 일상생활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정확히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 정상 상태가
한순간에 우리가 지닌 가장 신성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일상은 중단되었고, 아무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
지금은 변칙적인 시기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는 법을 익히고, 이례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이유가 죽음에 대한 공포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바이러스는 지능이 없지만 현재로선 우리보다 유능할지 모른다.
그들은 빨리 바뀌고 적응할 줄 안다.
우리는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
요즘 내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 성서 구절이 있다.
시편 90장의 말씀이다.
저희의 날 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다.
아마 전염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수를 세는 것 이외엔 없기에 그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우리는 감염자와 완치자, 사망자의 수를 세고, 입원자의 수와 학교 결석일의 수를 센다.
주식 시장에서 날아간 수십억과 마스크 판매 수, 진단시약의 결과가 나오는 시간을 센다.
감염원으로부터의 거리, 예약 취소된 호텔 방 수를 세고,
우리의 유대 관계와 단념한 것들을 센다.
그리고 날수를 세고 또 센다.
특히 이 비상사태가 시작되고 서로 떨어져 지낸 날 수를 센다.
그런데 시편의 구절은 우리에게 다른 관점을 암시하는 것 같다.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우리의 날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날에,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공백으로만 여겨지는 이 날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는 코로나19가 개별적인 사건이고, 역경이나 재앙이며, 다 '그들' 잘못이라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러는 건 자유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 사태에서 의미를 찾고자 노력할 수 있다.
정상적인 일상이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생각의 시간'으로 이 시기를 활용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지, 어떻게 되돌아 가고 싶은지 등을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날수를 세면서, 슬기로운 마음을 얻자.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이 헛되이 흘러가게 놔두지 말자.
파올로 조르다노[Paolo Giordano] 지음, 김희정 옮김, 2020,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Nel Contagio]』, 은행나무, 74-77쪽.
1982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2008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 <소수의 고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스트레가상Premio Strega과
캄피엘로상Prix Campiello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특히 그간 중견 작가들에게만
수여되던 스트레가 상을 젊은 신인 작가가 역대 최연소라는 기록을 세우며
수상한 이례적인 사건에 온 이탈리아가 주목했고, <소수의 고독>은 2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2010년 이탈리아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67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토리노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파올로 조르다노는
2012년 현재 같은 대학에서 입자물리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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