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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anJo's Curiosity
음식, 요리, 맛집

힘들어서 술 마셨니? 힘내!

by 후안조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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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매우 사랑하고 자주 마시지만 주사[]는 거의 없다.

...

 

주사를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사의 경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사회인으로서 공사 구분만큼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이 주사 구분이다.

술꾼들끼리 취했다, 안 취했다 티격태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디까지를 주벽 또는 술버릇으로 보고 어디까지를 주사로 볼 것인가는

술꾼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전을 빌려보면 주사를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주사'의 용례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다.

나에게 있어 '주사'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얼토당토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주사 분류법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

 

몇 주 전에는 [술에 취해] 슈퍼에 들어가서 열 개들이 약과 한 통을 사 들고 나왔고

(거기까지는 기억난다),

집에 돌아와서는 T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약과니까 약통에 넣어야 한다며

기어이 비상약통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약과들을 넣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약과, 출처: 위키백과

 

 ...

내 분류법에서 이건 주사가 아니다.

T를 어이없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게 T에게 딱히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며, 큰 영향을 받았대도,

그 정도 주사는 T도 밖에서 멀쩡한 척 하다가 집에 와서는 종종 부리는 수준이므로 T는 이해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파서 누워 있는 T에게 약과를 뜯어 내밀며 약 사왔으니까

지금 당장 물이랑 같이 먹으라고, 약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바락바락 권했다거나,

집에 오는 길에 동네 사람들을 붙잡고 약과를 약이라고 약을 팔았다면 그건 주사가 맞다.

...

 

 

나는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나는 흐트러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이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널 때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들겠지만 어쨌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김혼비 지음, 2019, 『아무튼, 술, 제철소, 41-45, 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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