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환경

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은 신문기자의 취재기사였다.

후안조 2024. 2. 15.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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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으로서
기자가 작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쓰는 대상'에 있다.
 

사진: Unsplash 의 The Climate Reality Project

 
작가는 상상의 세계를 축조하는 반면
기자는 사실 면면을 보고 듣고 경험해 기록한다.
기자들에겐 종종 '쉽게 쓰라'는 말이 격언처럼 통용된다.
 
문장의 맵시보단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색이나 각색을 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존하는 것이 기자의 의무일지 모른다.
 
사실은 기자의 취재를 통해 완성된다.
취재의 난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안다.
 
어떤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고
어떤 정보는 알아내기 어렵다.
 

사진: Unsplash 의 The Nix Company

 
민간인은 접근하기 힘든
권력기관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어떨까.
그것도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음험한 공작 정치가 자행되던
정보기관에서 벌어진 비화 같은 것이라면 말이다.
 
상술한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1990년 10월부터 2년 2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남산의 부장들>은 고난도 취재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걸작이다.
 
필자는 기자 김충식.
197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재직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금단의 영역이던
남산 중앙정보부(국가안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박정희 18년'을 해부한 논픽션 연재물이다.
 

사진: Unsplash 의 Waldemar

 
주말판 박스기사로 시작된 연재는
독자의 호응에 힘입어
전면 기사로 점차 몸집을 키웠다.
장안의 화제작답게
기사 하단에 별도 광고가 붙을 정도였다.
 
연재를 바탕으로 출간한 단행본 《남산의 부장들》 (1992-2012)도
당대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이를 각색한 동명의 영화(2020)도
그해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포스터: 나무위키

 
현재 가천대 부총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2022년에 후속작 격으로 '전두환 8년'을 파헤친
5공 남산의 부장들도 써냈다.
 
전두환(마지막 중앙정보부장)과
유학성, 노신영, 장세동, 안무혁
(이상 국가안전기획부장) 등
5명의 부장을 중심인물로 내세운다.
 
인터뷰를 위해 녹음기를 켜자
그는 "나는 취재했을 적에
웬만하면 녹음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불성설로 들렸다.

<남산의 부장들>엔 어림잡아 300명이 넘는
실명·익명 취재원이 등 취재량이 방대한데
녹음을 안할수가 있나요?
 
녹음기를 켜는 순간 상대방은 긴장합니다.
하려던 말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되죠.
(녹음을 하지 않으면) 좋은 점도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대화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상황에 맞아 떨어지는 질문을 할 수 있죠.
초인적인 기억력도 갖게 됩니다.
 

 
전두환의 처숙부이자 5공 비리의 주역인
이규광을 만난 기록만 원고지 200장이 넘었는데
그걸 단번에 정리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취재가 안 되니 피할 길이 없었어요.
이 또한 훈련이죠.
 
<남산의 부장들>이 연재된 건
노태우 정부(1988-1993) 때다.
신군부 대통령 치하에서 몸을 사리는 분위기는 여전했다.
 
기사가 나가면 어떤 이는
새롭고 재밌는 비화가 없는지 살피고
다른 이는 소송 걸게 없는지 따졌다.

그는 “달랑 펜 하나 들고 진검승부를
벌이는 기분"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기자 경력 12년차, 나이는 서른여섯에 불과했다.
 
부담이 컸겠습니다.
소송에 걸려도 죽는 것,
재미가 없어서 독자가 끊겨도
죽는 형국이었어요.
 
그야말로 기호지세騎虎之勢였죠.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으니
도중에 내려도 잡아먹히고
계속 타고 가자니 그 또한 괴롭고.
 
작가들이 절필하는 심정을 알겠더군요.
이름값은 있고 독자는 있는데
상像이 떠오르지 않는 거죠.
그런데 아무거나 써서 내보내는 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어요.
 
누군가 그를 강제로 호랑이 등에 태운 건 아니다.
스스로 올라탄 것이었다.
신년특집, 창간특집 같은
기획연재 아이디어 회의 때마다
<남산의 부장들>을 연재하겠다고 발제했다.
 
번번이 잘렸다.
'그거 말고도 쓸 게 많다'는 이유였지만
언론사는 청와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새로 바뀐 김중배 편집국장
(이후 한겨레신문사 사장, MBC사장 역임)이
그의 연재 제안을 받아들였다.
 
김중배 편집국장이 은인이네요.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편집국장이죠.
보통의 편집국장들은 절대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중앙정보부 기 : wikipedia

 
하지만 기자로서 어떻게 안 쓸 수가 있겠어요.
박정희 18년, 전두환 8년 동안 대한민국 정치의 8할은
남산이 운영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쓰지 않는다는 건
기자 집단으로선 직무유기가 아니냐고했고
김중배 국장이 지지해줬죠.
 
당시 그는 국회와 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였다.
 
정치부는 날마다 터지는 이슈만 취재해도
하루를 꽉 채워 일해야 하는,
노동집약성이 극대화된 부서다.
그런 와중에 그는 오히려
정치부 기자라는 입지를 십분 활용했다.
 
'남산 출신들'의 모임 양지회 소속 국회의원 56명 명단을
수첩에 적어두고 한 명씩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종필(JP)도 그 중 한 명이다.  ...
 

고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 wikipedia

 
'JP가 만나는 사람'으로 통한 겁니다.
어떤 예리한 독자들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JP에 대해선 싫은 소리를 하나도 안 썼다고 해요.
 
저로서는 아픈 말이죠.
하지만 일부러 좋게 썼다기보다
나쁘게 쓰기엔 JP 정치엔 불가피한 한계가 있었어요.
 
친소 관계가 취재를 방해할 것을 염려해,
만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장세동(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은
가혹하게 쓸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일부러 안 만났어요.
만난다고 해도 변명을 쓰게 되니까요.
 
허화평(전두환 정부 초기 대통령비서실 비서실보좌관.
사실상의 청와대 2인자 역할을 했다)은
다른 일로 만난 적은 있지만
<5공 남산의 부장들>을 쓸 땐 안 만났어요.
마찬가지 이유였죠.
 
김재규(8대 중앙정보부장)와
김형욱(4대 중앙정보부장)은
고인이 되어 만날 수 없었고. ...
 
신직수(7대 중앙정보부장)는 만나려고 참 애썼는데
끝내 못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신직수에 대해선
본인이 괴로울 만한 이야기도 많이 썼지만
한 번도 항의는 없었어요.
 
가장 어렵게 만난 부장은
김계원(5대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와 차지철(당시 대통령경호실장)을
총으로 저격한
김재규의 옆자리에 앉았던 인물.
 
《남산의 부장들》은 김계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김계원의 '사납지 못한 일처리'를
못마땅해 했다."
"박정희는 그래서 김계원을 두고 '야당 사람들한테도
남산골 샌님 소리나 듣는다지?'라고
불평과 질책을 했다고 한다."
 
권력의 근거리에 있었지만
권력과 온전히 밀착되진 못했던
김계원은 10.26 사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고,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88년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이후엔
정계와 거리를 두고 민간인으로 살았다.  ...
 
- 조문희, 이지훈, 이창수, 전현진 지음, 2023,
『논픽션 글쓰기 전설들 - 콘텐츠 발굴에서
스토리텔링까지, 12인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묻다』,
서해문집, 143-150쪽.
 
조문희
《경향신문》 기자. 경찰과 국회를 주로 취재했다.
한국기자협회, 민주언론시민연합,
국제앰네스티 등에서 수상.
《윤리적 저널리즘을 위한 뉴욕타임스 가이드라인》(2021)을 번역했다.
 
이지훈
《동아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등에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콘텐츠 기획 업무를 담당한다.
2022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 입학해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창수
대구에서 로스터리 브랜드 유락(yoorak)을 만들고 있다.
2015년 《세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몇몇 스타트업을 거치며 개발자와 기획자로 일했다.
 
전현진
기독교 매체 《뉴스앤조이》의 기자로 입사해
언론의 맛을 봤다. 《문화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경향신문》에서 일하고 있다.
이달의 기자상, 국제엠네스티 언론상,
한국기독언론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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