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라이프스타일

'미스터 트롯' 으로 코로나 시기를 이겨냈습니다.

후안조 2024. 2. 9. 01:09
728x90
반응형

 
평생 들은 것보다 많은 트로트곡들을
집중적으로 들으며 지낸 시기가 기억납니다.
 
2020년 봄, 팬데믹이 심각하게
번져나가던 때였습니다.
 
카페에도 갈 수 없고, 식당도 일찍 문을 닫고,
확진이 되면 어디를 다녀가서
누구를 만났는지가 공개되며
비난받기에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운 때였습니다.
 

사진: Unsplash 의 Martin Sanchez

 
겨울 한 달을 집에 칩거하며
마감한 원고의 출간은 무기한 미뤄지고,
아이디어를 써보낸 광고 론칭이 취소되면서
돈도 해명도 사과도 받지 못했어요.
 
질병에 감염되거나 사망하거나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제 처지가 특별히 힘든 것도 아니었죠.
다만 갑자기 많아진 시간이 어색해
밤마다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을 봤습니다.
 
제가 특히 열광했던 무대는 태권도를 하며
노래 부르는 출연자의 예선전이었어요.
 

사진: Unsplash 의 Uriel Soberanes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하는 노래를 부르며
동시에 무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공중제비돌기를 이어가는데
너무 힘차서 그대로 돌면서
바다까지 건널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분명 하체가 더 높은 곳에 있고
머리가 아래에 있는 순간에도
그 상태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멈추지 않는
출연자를 보면서
그 폐활량이, 코어 근육이
너무 감탄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그때처럼 자주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몰아서 보지도 않으며,
트로트 대신에 다른 음악들을 고루 찾아 듣습니다.
 

사진: Unsplash 의 Erik Mclean

 
세상도 저도 팬데믹에는 어느 정도 적응해서
다시 균형을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당시의 저에게는 그렇게 TV 앞에서
넋 놓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조명이 돌아가고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은
세상에 가득한 고통이 잠시 멈추는 것 같았어요.
중력도, 갑갑한 현실의 우울도, 코로나의 불안도
잊을 수 있을 것처럼요.
 
사람은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도
그것들을 필요로 해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일요일마다
예배당이나 절에 가듯
어떤 사람들은 TV를 틀어놓고
그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바흐 시대 이전부터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도 노래가 있었지요.)
 

사진: Unsplash 의 Anna Dziubinska

 
그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나머지 여섯 날에 힘을 내고,
슬픔을 견디고, 화를 내고,
해야 할 싸움을 이어나갈 지도 모른다고요.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로 '한'을 이야기 할 때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너무 강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수긍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
 
물론 저의 이태원에서도
수많은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혼비씨는 무엇에 기대어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나요?
담요님은 담배가 더 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
 
- 황선우, 김혼비 지음, 2023,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 총총 시리즈』,
문학동네, 92-94쪽.
 
황선우
『멋있으면 다 언니』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퀸즐랜드 자매로드』를 김하나와 함께 썼다.
팟캐스트 <여둘톡: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제작, 진행하고 있다.
향해가는 것은 언제나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지만,
이번만큼은 설렘이 훨씬 컸습니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을 쓰고,
『전국축제자랑』을 박태하와 함께 썼다.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들만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