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역가예요, 아줌마이기 이전에...
라디오를 듣는 일이 거의 없다.
5년 전에 국카스텐이 출연한다고 해서 들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가
가장 최근에 자발적으로 들은 라디오방송이다.
그전에는 아마도 대학생 때 들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 그런데 공교롭게 다시 들은 라디오 프로가 <배캠>이었다.
어느날 그곳에서 내 글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모 출판사 편집장님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
내게 메일을 보내고 퇴근하는데 〈배캠〉에서 내 책에 실린
「하루키의 고민상담소」가 나와,
놀랍고 신기하고 반가워서 얼떨결에 전화를 하셨단다.
내 이름과 책 제목은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내 책의 에피소드였다고 했다.
이게 웬 영광이야, 하며 '다시 듣기'가
올라왔을 때 얼른 들어보았다.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화가 났다.
엄청나게.
내 글은 내 글인데 에피소드의 주어가
권남희가 아니라
"한국에 사는 어느 아줌마”였다.
책을 줄줄 읽는데, 주어가 계속 "아줌마가"다.
아니, 내가 아저씨 아니고 아줌마인 건 사실이지만,
아줌마이기 전에 그 글을 쓴 작가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작자미상의 글도 아니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에 실린 글이다.
주어가 '어느 번역가' 정도만 됐어도
아쉽지만 <배캠>에 내 글이 나온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줌마가, 아줌마가.
마치 한국의 어떤 아줌마가 주책스럽게
무라카미 하루키한테 고민을 상담한 것 같은 분위기다.
설마, 설마하며 듣는데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보낸
질문까지 그대로 읽었다. ...
출판사에서 대신 항의 전화를 했더니,
며칠 뒤에 이 책 소개를 하기로 되어 있어서,
한 주에 같은 책을 두 번씩 방송하면 안 되기 때문에
제목을 말하지 못했다고 정중히 사과했다고 한다.
단순한 아줌마는 "아줌마가” 때문에 화난 건 금세 잊고,
배철수 님이 내 글을 또 읽어준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정말로 며칠 뒤 책을 소개하는 방송이 나왔다.
대구 사는 언니도 매일 이 프로그램을 듣는 애청자여서
실시간으로 들었다고 한다. ...
- 권남희 지음, 2021, 『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마음산책, 136-138쪽.
권남희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이자 에세이스트.
지금까지 《작고 작고 큰》, 《마녀 배달부 키키》, 《도망치고, 찾고》,
《소중해 소중해 나도 너도》, 《라이온의 간식》, 《무라카미 T》 등
30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지은 책으로 《번역에 살고 죽고》,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혼자여서 좋은 직업》, 《어느 날 마음속에 나무를 심었다》,
《스타벅스 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