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화약무기를 개발한 고려의 최무선
왜구 토벌을 고심하던 최무선에게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화약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초기인 10세기 무렵부터
화약을 제조하고
이를 이용한 화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제조기술은 극비에 부쳐졌기 때문에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화약은 14세기 초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야
고려에 전해지게 되었다.
당시 왜구의 극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고려 왕실은 화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
끈질기게 화약 공급을 요청했다.
마침내 1372년(공민왕 21)에 간신히
중국으로부터 염초와 유황 등
화약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는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하기 이전에
이미 화약의 구성 물질에 대한
기초지식은 어느 정도 알려졌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화약의 주원료 중 하나인
염초를 추출하는 방법과
이를 유황, 목탄과 혼합하는 비율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
염초는 절간이나 부뚜막, 또는 온돌바닥의
흙을 모아서 물에 탄 뒤
이를 가마솥에 넣어 끓이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내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화약제조에 노심초사하던 최무선은
곧 염초 제조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던 중
최무선은 당시 상거래 차 고려에 온
이원(李元)이란 중국 상인
(원래 염초 제조기술자였음)을 통해
염초 제조비법과 화약 원료의 혼합비율을
알아낼 수 있었다.
드디어 화약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화약무기 제작과 실전 활용
화약제조법을 터득한 최무선에게 남은 문제는
'어떻게 이를 활용해 왜구를 토벌할 것인가?'였다.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최무선의 명성을 전해 들은 고려 왕실에서
1377년 말 개경에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그를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이다.
최무선은 왕실의 재정적 지원으로 화약을 사용할 수 있는
각종 화기를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
그동안 고려 군대가 주로 의존하고 있던
활이나 창 같은 근력무기에 비한다면,
화약무기의 출현은 대단한 변화였다.
화약무기는 고려 수군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
화약무기가 도입되면서 고려 수군은
함선에 설치된 화포로
원거리 함포사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동성 때문에 얇은 나무판자로 건조된 왜선은
함포 공격에 취약했다.
고려 수군이 보유한 함포의 우수한 성능을 입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380년(우왕 6) 8월에 벌어진
진포(금강 입구) 해전에서
고려 수군은 500여 척의 선박으로 침략해 육지에서
노략질을 벌이고 있던
왜구에 대응해 화포를 활용한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
화약을 제조하고 화약무기를 개발해
왜구의 침탈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데 기여한
최무선은 1395년 4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대에
화약무기 전성시대를 연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었다.
...
- 이내주 지음, 2013, 『한국무기의 역사 | 살림지식총서 466』, 살림, 47~50쪽.
이내주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군사사연구실장 및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
영국 서식스대학교에서 영국 근현대사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마쳤다.
영국사학회 회장, 한국연구재단 책임전문위원,
학술지 『서양사론』 및 『군사연구』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영국 과학기술교육과 산업발전, 1850∼1945』,
『전쟁과 무기의 세계사』, 『군신의 다양한 얼굴』, 『영웅, 그들이 만든 세계사』,
『전쟁과 문명』(공저) 등이 있으며, 이외에 다양한 연구논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