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을 좋아한다고 '키덜트'가 아니라고요
피터 팬 콤플렉스와 키덜트를 증오한다.
집에 장난감이 좀 있으면 다 같은 통속으로 범주화하는 풍토에 저항한다.
TV에 나오는 여러 셀럽들이 베어브릭이나 이런저런 희귀한 일제 다이캐스팅 피규어,
세그웨이 같은 전동 제품들을 집 안에 장식해 놓고 있는 것을 보면 좀 뭐랄까...
같은 장난감 애호가지만 그건 내 문화가 아니다.
아니, 보고 있으면 솔찍히 내가 다 부끄럽다.
다 큰 어른이 장난감을 갖고 '내 취미는 이런거야, 순수하지? 귀엽지?'
이러는 것 까지는 참을 수 있겠는데
그걸 전시하듯이 내놓고 어린 시절 추억과 합금한다던가,
불이 들어오는 케이스에 가둬둔다던가,
박스채 보관하며 가격을 운운하는 모습들은 왠지 패션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키덜트, 피터 팬 콤플렉스를 소년의 순수함이나
크리에이티브와 연관짓기 시작하면
내가 먼저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다.
키덜트와 우리는 뿌리부터 다르다.
우리가 장난감과 조우하고 연을 맺은 출발선이 유아기라면
오늘날의 키덜트족은 청소년기, 혹은 구매력을 갖춘 성인 이후에 유입된 사람들이다.
아예 서로 다른 종인 거다.
우리에게 장난감은 수집 대상이 아니다.
놀이 도구로 연을 맺고 관계를 이어온 일생의 동반자다.
몇 곱절은 더 살았지만 장난감에 처음 눈을 뜬 다섯 살 아이와 갖고 노는 메커니즘이 지금도 동일하다.
여전히 장난감은 상상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도록 돕는 매개이며 친구다.
물론, 연륜이란 게 있다보니 세계관의 깊이가 다섯 살 아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
반면, 매스컴에 등장하는 키덜트족은 드론 같은 전동완구를 다루거나
일본 애니매이션이나 게임, 할리우드의 라이센스 제품들을 주로 '수집'한다.
즉, 장난감과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게 아니라
자신이 푹 빠졌던 대중문화 콘텐츠를 경배하는 것에 가깝다.
...
이렇게 장난감과 일상을 함께해온 내게
최근 들려오는 키덜트, 한정판, 동호회 등의 표현과
거기에 씌워지는 분위기는 영 어색하고 마뜩잖다.
장난감은 혼자 상상 속에서 갖고 놀 때 본연의 빛을 발하는 법인데,
키덜트 문화에서 이 부분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장난감은 내게 추억의 산물이나 취향이 아니다.
오랜 세월 전투를 함께해온 전우이자 일상이다.
전시해 놓거나 되팔 수 있는 관계가 절대로 아닌 거다.
긴 세월 함께해 온 장난감들을 처박아두거나
되팔 정도로 아직 우리 세계의 낭만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키덜트족이 득세하면서 이 대서사시를 어디서 꺼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추억을 되살린다거나, 순수한 소년의 감성이라던가,
얼마나 희귀한 것들이 있느냐는 식의 평가와 질문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장난감과 함께했던 내 일상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
...
새로운 세태로 등장항 키덜트와 같은 부류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여전히 갖고 노는 것과
어른이 되어서 장난감을 소비하는 것은 정말 다른 이야기다.
키덜트족의 득세는 마치 켈트족을 점령한 앵글로 색슨이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을 이리저리 엮어서 은근슬쩍 자기들의 영웅서사로 둔갑시킨
<아서왕 이야기>와 비슷하다.
장난감과 함께 해 온 관성에 대한 내 자부심은
뮌헨지방에서 공표했던 맥주 순수령 같은 거라 봐줬으면 좋겠다.
특히 전자게임이나 전동완구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한 묶음으로 놓이는 건 정말 참기 힘들다.
김교석 지음, 2017, 『아무튼, 계속』, 위고, 109-1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