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글 쓰기

만년필을 쓴다고? 굳이?

후안조 2022. 8. 27. 18:32
728x90
반응형

만년필에는 '굳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사실 뭔가 쓰려고 할 때 손에 집히는 필기구를 아무거나 집어 쓰면 그만이다.

이럴 때 볼펜이나 사인펜은 고장 날 일도 없고 잉크를 넣을 필요도 없어 간편하다.

이 편한 걸 눈 앞에 두고도 매번 컨버터에 잉크를 넣어줘야 하고,

잉크가 마르거나 터져버려 곤란해지기도 하는 만년필을 가지고 다니는 건

굳이 안해도 되는 귀찮은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일이기도 하다.

...

 

 

그러나 돌이켜 보면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비효율적인 시간들에 있다.

빨리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것들,

이를테면 전화로 할 말을 느릿느릿 손편지로 쓴다던지,

파워포인트 기본 기능으로 빨리 만들 수 있는 자료를

굳이 손으로 그리고 써서 만든다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이런 비효율적인 일엔 왠지 만년필이 어울린다.

 

정말이지 만년필을 사용하는 건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어여쁜 색의 잉크도 실제로 넣어서 획을 그어보기 전까지는

정확히 어떤 색깔이 나올지 알 수 없고,

검정 잉크도 농도별로 달라서 써보기 전에는

내가 원하는 검정이 맞는지 계속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

 

 

또 아무리 오래 쓴 만년필도 잠깐 안 쓰면 잉크가 굳어버려 따뜻한 물에 녹여줘야 한다.

이럴 때면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삐진 친구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수고로움 속에서

'이걸 마지막으로 사용한 적이 언제였지? 

그동안 책상에 앉아 쓸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았구나'

하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

 

생각해보니 나는 굳이 수고를 들이는 일들을 좋아한다.

칼로 연필을 깎고, 매일 시계의 태엽을 감고, 일력을 뜯고,

전기포트를 놔두고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인다.

 

 

이런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걸 뜻한다.

(바쁠 땐 일력도 밀리고 시계도 멈춘다.) 

그래서 나는 내 일상 속에 항상 쓸데없는 일들이 조금씩 자리하고 있기를 바란다.

빠르게 움직이는 일상 속에 수고로운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기에.

...

 

만년필에는 '길들인다'라는 표현을 쓴다.

내가 만년필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다.

...

 

 

오랜 시간 써서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만드는 것.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맞춰나가는 상태로서의

필기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도구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도구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

...

 

오랫만에 만나도 늘 반갑고 좋은 기억만 남기는 사람들이 있듯,

만년필은 나에게 그런 존재다.

 

 

김규림 지음, 2019, 『아무튼, 문구, 위고, 65-6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