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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들이 백자를 썼다고? - 미술사 전공자의 수난

후안조 2024. 2. 17.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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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의 집에 처음 놀러 간 날,
갑자기 <TV쇼 진품명품>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동료가 나를 가리키며
"이 언니는 도자사를 전공했어" 하고 소개하자마자,
그의 아버지가 반색을 하며
안방에서 조그만 항아리 하나를 꺼내 오셨다.
 

일제 강점기 대 모란 항아리

 
그러고는 아주 신이 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도자기를 공부했으면,
이게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알아요?
이 항아리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어머니 방에 놓여 있었던 거라고."
 
둥글납작한 형태에, 항아리 어깨에는
팬지처럼 생긴 파란 꽃이 그려진 백자였다.
20세기 전반에 무척 많이 만들어진 디자인이라,
지금도 골동품상을 지나다 보면
선반에 하나씩은 올려져 있는 비교적 흔한 물건이다.
물끄러미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는 내게
재차 질문이 쏟아졌다.
 
"어때요, 만약에 판다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을까?
혹시 아주 값나가거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요?“
 
아, 역시 값을 알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난감했다.
대답을 고르며 우선 슬쩍 웃는데,
다행히 동료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섰다.
 
"아휴, 나는 언니한테 언제 만들어진 건지나
묻는 줄 알았지.
아빠,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매매에 대해 조언해주는 거 금지되어 있어."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진짜라니까?“
 

ICOM 윤리강령 : ICOM 홈페이지 캡쳐

 
무안을 당하고 잠시 샐쭉해 있던 동료의 아버지는
조금 아쉬운 눈치로 도로 항아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정말로 이 세상에는
'국제박물관협[의]회[ICOM]'라는 것이 있고,
이 협[의]회에서 정한 윤리강령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미술품 매매에 대한 조언을
금지하는 내용이긴 하다.
 
사실 나는 골동품 시세를 알지도 못하니
동료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상황은 금세 끝났을 테지만,
 
일반인들이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총 세 가지다.
 
우리 집 골동품의 진위 감정과 시세 고지,
그리고 한문 해석.
 
지인들은 갑자기 중국집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여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해석해봐” 하고 나를 재촉하기도 한다.
 

사진: Unsplash 의 Wan San Yip

 
한 술 더 떠 “오, 그럼 옛날 그림에 있는
한자들도 읽고 막 그러겠네?"라고 한다.
 
컴퓨터공학과 출신에게
컴퓨터 쇼핑을 도와달라고 하거나,
국문학과 출신에게 자기소개서를 봐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기대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의외로 미술사를 공부한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중에는 처음 본 동양화의 제발을
술술 읽어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
 

조맹부의 <작화추색도>를 주제로 한 대만 우표

 
동양화에는 화가가 그림을 완성한 뒤 쓰는
이름이나 도장이 찍힌 낙관 외에도
여러 가지 글이 더해진다.
 
그림 제목을 쓴 화제畵題,
제목 대신 주제를 시로 표현하는 제시題詩,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나 날짜 등을 적는 발문跋文 등을
아울러 제발題跋이라고 부른다.
 
옛 그림은 글과 그림,
낙관이 한데 어우러져 완성되는 것이다.
 
박물관이나 전시장에는 작품 아래나 옆에
제목과 작가명, 제작 연도와 짤막한 소개를 적은
팻말이 있다.
 
그런데 동양화는 이런 정보가
작품 안에 다 담겨 있다.
 

단원 김홍도 <심관> :&amp;nbsp;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에는
이제 막 완성된 듯한 그림의 두루마리를
여러 사람이 함께 펼쳐 보는 장면을 그린
<그림 감상 觀[심관]>이라는 작품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그림을 펼치기만 하면
그 자리가 전시회장이 되었을 것이다.
 
한문만 읽을 줄 안다면.  ...
 
...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예스러운 전서체나 휙휙 흘려 쓰는 초서체는
따로 공부해야 한다.
반듯반듯한 글씨체인 해서체나 행서체는
겨우 알아보지만
초서체는 단 한 글자도 못 알아볼 때가 많다.
 
이 모두를 읽고 싶다면,
그 모두를 각각 다 공부하는 수 밖에 없다.
 

사진: Unsplash 의 Loes Klinker

 
미술품이나 문화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미술사 전공자의 수난은 계속된다.
대학 시절 한국미술사 수업에서 교수님이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조선 후기 양식의 청화백자가 나오더란 이야길 하며
혀를 차시곤 했다.
 
그때는 '어차피 드라마 아닌가?' 했지만,
아는게 병이라고 결국 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나 역시 삼국시대 주막에서 백자 술병이 나오거나,
조선시대에 열심히 고려청자를 만드는 장인이 등장하면
적잖이 고통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임을 알아도
시대적 오류를 참기가 괴로운 것이다.  ...
 
- 신지은 지음, 2022,
박물관을 쓰는 직업 -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일과 유물에 대한 깊은 사랑을 쓰다 』,
마음산책, 134-140쪽.
 
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박물관에서 전시와 소장품을 소개하는
메일링 서비스 「아침 행복이 똑똑」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는 미술사를 공부했다.
박물관 전시와 문화재에 대한 글을 쓰며,
현재 한 일간지에 칼럼
「신지은의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를 연재 중이다.
 

 
 
#그림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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